[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글을 열며 나는 누구인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제1장. 나는 왜 고독한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2장 나는 왜 착각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3장 나는 왜 후회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4장 나는 왜 집착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5장. 나는 어떻게 공감하는가
(권택영, 글항아리, 2018)
왜 금지된 것에 내 마음은 타오르나. 나는 결코 금지된 것을 알면서 단념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더니 하라고 하니까 오히려 하지 않는다. 아, 공부란 누가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지는구나. 하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안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면서 안 한다.
알면서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다. 시간에 쫒겨 살면서, 왜 바쁜지도 모르면서, 때가 늦으면 부모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더 자주 찾아뵙고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 그러고는 부모님이 세상을 뜨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한다. 무덤가에서 우는 자식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 왔는가. 마치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평생 살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톰은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억지로 지키는 반면 허클베리는 합리화를 하면서 지키지 않는다. 양심보다는 본능을 따른다. 톰의 행동은 억지스럽고 허클베리의 행동은 자연스럽다. 트웨인은 이 두 인물을 대조하면서 법이나 제도의 허실을 보여준다. 허클베리는 외로운 방랑생활에서 진실한 벗이 된 짐을 백인보다 더 착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느낌을 따라 도망친 노예를 고발해야 한다는 법을 어긴다. 그가 고발장을 찢을 때 그는 죄를 짓고 감옥에라도 갈 생각이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의 문제점을 의식의 입장에서 주장하고 지적한다. 이것을 감각의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은 신의 한 수다. 입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손끝이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면서 하는 것, 오직 잘 짜인 예술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아무리 울기에 슬프다고 알려줘도 나는 여전히 슬퍼서 운다고 생각한다. 늦게 진화한 의식이 속임수의 훈련을 해왔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위해 그렇게 교육받고 합리성을 위해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문명은 하나의 대안을 제시했다. 내러티브라는 서사 예술이다. 의식에 가린 감각의 힘을 경험하게 하라. 감정을 억압하면 오히려 그 힘이 더 커진다는 역설을 깨닫게 하자. 감각이 의식과 균형을 맞추게 하자. 우리가 조이스를 즐기고 예술을 받드는 이유다.
파충류의 감각을 달래는 방법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경험하는 것이다. 자의식은 바로 이 감각을 바탕으로 진화한 것이고 이야기를 꾸미는 의식이다. 뇌는 알면서 하지 않거나 모르면서 수행한다.
사람에 따라서 감정에 좀더 충실한 이가 있고 좀 더 이성적인 이가 있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이 둘 사이 어디쯤에 있다. 만일 내가 감정적 인간이라면 자의식을 강화하고 반대로 자의식이 너무 강하면 감정을 연습하라.
앨리스 먼로의 단편을 읽으면서 소녀가 문을 활짝 열 때 박수를 치고 마지막 단락을 끝내면서 감탄하는 자는 누구인가. 감각이 먼저 태어났음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을 흡수하여 실제로 느끼도록 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며 판단하고 감탄하는 것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때문에 나는 알면서도 하지 못하고, 모르면서 한다. 감각과 의식의 이중 구조 때문에 뇌는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상상력, 즉 이야기를 꾸미는 천부의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잠을 못 이루고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빠지는 로봇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공적인 삶은 이중 구조를 존중하여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얼마나 지혜로운 타협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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