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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방

생각의 속임수 - 5장. 나는 어떻게 공감하는가

by 행복배터리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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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글을 열며 나는 누구인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제1장. 나는 왜 고독한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2장 나는 왜 착각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3장 나는 왜 후회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4장 나는 왜 집착하는가

 (권택영, 글항아리, 2018)

오직 인간의 뇌만이 러시아 인형처럼 세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품을 따라하는 생리적 감염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씨앗인 하부의 소뇌와 소통할 때는 감정의 감염을 일으키고 껍질인 상부의 전두엽 연합과 소통할 때는 인지와 판단을 하게 된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광화문 광장에서 응원을 하는 순간에는 감정 감염이 작용하고 이튿날 직장에 나가 내 인지와 판단에 따라 하는 행동은 고독한 개인의 것이다.

동물 연구를 초석으로 삼는 뇌과학자인 야크 판크세프는 하부를 정서 의식이라 부르고 상부를 인지 의식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단언한다. '정서 의식은 인지 의식과 구별되고 더 오래된 부위다. ' 단 한 줄이지만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정서 의식은 본능에 속하고 인지 의식은 진화된 자의식에 속한다. 본능이 먼저 태어났고 자의식은 그 뒤에 나타난다. 인간만이 두 부위가 연결되어 공감을 이루기에 하품을 따라하는 것이다.

유아기는 포유류적 뇌에서 인간의 뇌로 발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고 정서 의식 위에 인지 의식이 발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사이코패스라든가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인을 유아기에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데서 찾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유아기는 동물과 다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의 공감의 역할을 강조한 하인츠 코후트는 어머니의 적절한 보살핌이 훗날 공감의 바탕이 된다고 주장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사메니투스 왕이 늙고 초라한 하인을 발견하고는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공감에 속한다. 그가 하인에게서 본 것은 바로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앨런 M. 레슬리의 말처럼 척하는 놀이는 내가 엄마인 척, 네가 의사인 척하는 이중적 인지를 통해 유아가 사회성을 배우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그 놀이를 어른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를 흉내 내는 일도 즐겁지만 비밀을 갖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감정 감염과 다른 인지적 판단이라는 이차적 공감으로 가는 순간은 우리가 비밀을 갖는 순간이었다. 감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자의식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비밀을 갖는다는 것은 자의식의 시작이고 포유류를 넘어 인간의 공감으로 향하는 이정표였다.

신은 인간을 외로운 개인으로 창조하는 대신 공감이라는 소통의 능력을 주었다. 나는 개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이중 구조이지만 하나의 끈에 연결되어 있기에 어는 한쪽이 기울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 질환이 나타난다.

이런 이중 구조 속에서 살기에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한번은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는다. 사회 속에서 겪는 배반과 고립에 의한 부정적인 생각이 오래 지속되면 우울증이 생긴다. 치매도 사회적 소통이 막힐 때 일어나기 쉽고 테러 역시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되곤 한다. 고립은 증오를 낳고 억제하지 못하는 공격성으로 옮아가 무차별 테러를 낳는다.

신은 고독과 함께 사회적 소통이라는 공감의 능력을 선물했다. 공감하지 않는 고독은 없고 고독 없는 공감은 없다. 둘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삶은 즐겁다.

공감은 앞선 경험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공감이 구현된 언어 역시 과거 경험의 흔적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개인에 따라 흔적이 다르기에 언어는 여분을 품고 있고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진정한 공감은 감정을 동일시할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인지적 판단을 동시에 요구하고, 이런 이중 마음으로 인해 공감은 연습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구는 합리성을 강조하고 동양은 감성이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에게 규율을 강조하는 서구에서는 사랑이 강조되어야 하고 아이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한국에서는 규율이 강조되어야 한다. 쏠림이 극단적이 되는 것은 나라에서도 개인에게도 질환으로 발현되는데, 감정이 넘치고 인지적 판단이 약하면 자폐증으로, 반대로 감정이 고갈되고 인지만 남으면 사이코패스가 된다.

정상인은 신념을 조정하는 감정이 있으나 사이코패스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빗나간 신념이 그를 조정하는 주인이 된다.

사적인 감정과 경험을 가질 수 없는 인공지능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러 자료를 입력하고 그 자료에 의해 움직이는 효율적인 기계에 머물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앎과 거리가 멀다. 정서와 인지가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자의식 공감이 없다면 인공지능은 보조 수단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 서구 근대사회는 이성을 존중하고 감정을 억압해 왔다. 영혼은 숭고하고 몸은 천하다고 가르치며 인지와 사유가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알면서 하지 않고 모르면서 하는 존재임을 감추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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