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박경리지음, 마로니에 북스, 2012)
1권
제1편 어둠의 발소리
배가 고프면 먹여주는 자에게 빌붙고 배가 부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떠나가고 따뜻한 곳에는 모여들고 추운 곳은 버리는 게 세상의 인심이라 그 말일세
괘씸한 놈! 코도 닦아주고 얼굴도 씻기주고 자식같이 키운 놈이! 많이 받은 놈은 많이 악문하고 작기 받은 놈은 작기 악문한다 카더마는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 카이
제2편 추적과 음모
'아무 데 가믄 우떻노.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십여 년 전에 듣던 월선의 말이 귓가에서 맴을 돈다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네기의 신세인 것이다.
제3편 종말과 발아
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 자기만이 아는 쓰레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죽음을 생각해보는 여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무섭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4편 역병과 흉년
최참판댁 문전에는 예전과 달리 각처의 마름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는 조준구가 갈아치운 사람들이 있었다 호열자로 죽은 사람 자리에는 물론 조준구의 입김이 닿은 사람을 앉혔으며 대세를 따라서 옛적부터 최참판댁 일을 보아온 사람도 점차 마음을 달리했다. 자연 그들은 드나들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았고 조준구 기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아첨이 늘어갔다. 어쩔 수 없는 인심의 추세다. 간사스럽지 않던 사람도 간사스러워지고 의리가 있던 사람도 의리를 잃어버리고 땅속에 묻힌 사람은 말이 없으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들의 살 길이요. 처자식의 얼굴이다.
제 5편 떠나는 자, 남는 자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한 서희,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제 나이를 넘어선 명석한 일면이 있었다. 본시 조숙했지만 그간 겪었던 불행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많은 죽음들로 해서 그의 마음은 나이보다 늙었고 미친듯이 노할 적에도 마음 바닥에는 사태를 가늠하는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 서책에 묻혀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그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으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또 지혜를 기르는 데 살찐 토양이 되어주었다.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에서부터 서고에서 꺼내어 온 여러 가지 한서를 읽었으며 그 중 오경의 하나인 《춘추》를 탐독했다. 그 밖에 서울서 발행되는 신문조각 같은 것도 가끔 읽었다. 이쯤 되면 여식으로서 박학하고 세상 물정에 밝다 하겠는데, 그것으로 총명한 천품을 무한히 닦아갈 수도 있겠는데 서희는 그 명석함도 자기 야심과 집념의 도구로 삼으려 했을 뿐 자신에게 합당치 못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총명이 뚫어본 사실일지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명한 고집 앞에 이성은 물거품이 된다. 그에게는 꿈이 없다. 현실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왜곡된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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