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피 미디엄 지음, 박주은 옮김, 한국경제신문, 2022)
출근길의 지혜_서양철학
걱정: 직장인의 기본 심리 상태
하이데거_번뇌를 어떻게 초탈할 것인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걱정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무얼 걱정하는지 명확히 하기만 해도 진실로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걱정(번뇌)을 초탈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바로 여기에 걱정의 긍정적 의의가 있다.
당신의 걱정은 당신만의 독특함을 반영한다
우리가 하는 걱정에는 나와 남들이 공유하는 인식과 가치가 반영돼 있다. 우리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뭔가는 걱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 사이에 격차가 벌어질 때 걱정이 생겨난다. 걱정에는 나 자신의 인식과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 이 두 가지가 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죽음, 지루한 일상을 깨우는 종소리
죽음은 인간에게 최대의 한계지만, 하이데거의 눈에는 빤한 일상을 깨우는 찰나의 경종이었다. 죽음은 영원히 내밀하고 독특하며 중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무상함을 의식하고 나면 무리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불안: 사표,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사르트르_자유와 불안은 한 쌍의 쌍둥이
절대적 자유에는 절대적 책임이
자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나는, 언제든지 그 이전의 결정을 부정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대자적 본질을 관철하는 일이자, 미래의 나를 빚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그 누구도 나에게 특정 행동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해 어떤 변명도 찾을 수 없게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생겨난다. 즉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절대적 자유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이다.
퇴사에 대한 고민 또한 이러한 실존적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다. 퇴사 자체는 선택해도 되고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퇴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첫째, 퇴사 여부는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라는 문제가 따른다.
둘째,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당신은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선택을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
공포: 출근이 두려운 근본적인 이유
마르크스_블루, 블루 먼데이
노동의 본질을 찾아서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월요일은 주중 가장 어두운 날일 것이다. 평소에는 삶에 대해 별다른 의문도 들지 않건만, 월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면 출근의 의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묻게 된다. 출근 전엔 울적하고 퇴근 후엔 피곤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유일하게 활력을 느끼는 순간은 하루의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때뿐이다.
지금 하는 일에 자아실현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면, 월요일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만은 않지 않을까?
부조리: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의미인가
카뮈_월급을 받는 시시포스
부조리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
- 반항, 자유, 열정
모든 외재적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거기엔 아무런 절대적•고정적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똑바로 서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공통된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사회적 기대라는 속박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시시포스와 마찬가지로 반항 자체가 우리를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에 우리가 소망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 열정, 뜨거운 애정의 표현이다
혐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을 미워하다
니체_혐오를 벗어나 분노를 동력으로
혐오의 최고 경지는 혐오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 분노를 동력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니체의 초월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를 떨치고 비관을 동력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뛰어넘도록 이끈다.
굶어죽지만 않을 정도의 푼돈을 버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낙도 없는 삶.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소한 성취, 딱히 말할 가치 없는 작은 진전.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또다시 오늘 같은 혐오스러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염세를 뛰어넘어, 초인이 돼라
마지막으로 초인이 있다. 시대의 고난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이 특정 조건에서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간파하는 능력도 있다. 초인은 행동으로 가치를 전복하고 재구성하여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비극적인 자는 다음번 세상이 더 낫기를 희망하고, 증오하는 자는 마땅히 가졌어야 하는 갖지 못한 것을 증오하고, 거부하는 자는 모든 욕망을 거부할 뿐이다. 어떤 생이든 마찬가지다.
불평: 나를 이용하려 하지 마
칸트와 파핏_인간의 도구화에 대하여
칸트는 인간의 도구화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영국의 철학자 데릭 파핏은 인간의 도구화에 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 규명과 반성적 사유를 보인다. 특정 조건 하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의 도구화를 허용한다는 것
파핏은 칸트의 순수도구원칙이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 한가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타인을 순수한 도구로 삼는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잘못이지만, 행위의 옳고 그름은 타인을 순수한 도구로 삼는 태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소진: 당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들뢰즈_혁명이 필요한 때
당신도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겹기만 한가? 따분함이나 지긋지긋함을 넘어 그 어떤 일도 당신의 감정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너무 지쳐 있는 것이다. 들뢰즈를 읽어야 할 때다
소진은 결국 의미의 상실이며, 남은 것은 이제 끝없는 무신경, 끝없는 복제, 끝없는 무감각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삶에 혁명을 일으키거나
소진이 우리 삶에 드러내는 것은 실존적 극단 상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 상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삶에서 추구했던 것이 단순한 안일이 아니라 샘물처럼 용솟음치는 활기와 창조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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