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스승 정약용이 가슴으로 남긴 유산
(정약용 지음, 박지숙 엮음, 푸른책들, 2015)
제1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 두 아들에게 띄우노라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마라
내가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조금이라도 근심거리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이 크게 도와주곤 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찾아와서 안부를 물었고, 어떤 사람은 부축해 주며 위로해 주기도 했다. 또 약을 보내는 사람, 양식까지 대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너희가 어릴 때부터 이런 일들을 보아 익숙해 진 것 같구나. 그래서 늘 남의 은혜를 바라고 있으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처지가 된 것을 잊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한테 도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결코 안 되는 법이다. 더구나 우리 일가친척은 오래전부터 서울과 시골에 흩어져 살아서 은혜로운 정을 베풀 수도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서로 탓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만도 두터운 은혜인데, 어찌 도움까지 바라겠느냐?
폐족도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편지를 보내 학문에 힘쓰라고 여러차례 말했다. 그런데 너희는 한 번도 경전이나 예악에서 의심스러운 점이나 역사책에 대한 논란을 묻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내 말을 새겨듣지 않는 게냐? 너희는 도회지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문전 잡객이나 하인배, 아전들의 거친 말씨나 약아빠진 마음씨를 보고 배울 수 밖에 없었지. 그래서 이렇듯 어그러지는 것이더냐? 못된 병이 뼛속 깊이 박혀, 너희 마음속에 착한 행실을 즐겨하고 학문에 힘쓰려는 생각이 전혀 없게 되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집안에는 늘 화목한 기운이 들도록 힘써야 한다. 친척들이 모일 때나 친한 사람이 찾아오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라. 또 하룻밤이라도 더 편안하게 묵도록 하여 그분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드리려 한다. 그저 무릎이나 꿇고 앉아서 안부나 묻고는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무뚝뚝하게 손님을 대하여 어색하게 만들면 안 된다. 손님이 가는데도 붙잡지 않고 마루에서 내려와 인사도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자는 뭇사람들이 결코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며 평생의 복을 차 버리게 될 것이다. 부디 조심하도록 해라
2. 두 아들에게 답변하노라
경전 공부에 대하여
남의 저서에서 요점을 뽑아 책을 만들 때는 먼저 내 학문에 대한 주관이 뚜렷해야 한다. 그래야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똑바로 서서 올바르게 취하고 버릴 수 있다. 학문의 요령에 대해서는 지나번에 얘기했거늘, 너희는 벌써 잊은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남의 저서에서 요점을 뽑아 책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의심나는 것이 있다고 질문하느냐? 무릇 책을 읽을 때는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살펴보고, 그렇지 않으면 눈여겨볼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면 백 권의 책일지라도 열흘 정도 공들이면 읽을 수 있느니라.
삶의 기준에 대하여
세상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이 그 하나요, 이롭고 해로움을 따지는 기준이 다른 하나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 첫 번째 등급이고,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로움을 입는 것이 두 번째 등급이다. 그른 것을 좇아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 세번째 등급이며, 그른 것을 좇고도 해로움을 당하는 것이 마지막 등급이다.
제2부 두 아들에게 내리는 교훈
친구를 사귈 때 헤아릴 일
맏이 학연에게 전하노라.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을 때는 효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학식이 높고 문장이 훌륭해도 흙담에다 색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마음과 행실을 올바르게 닦았다면, 그가 사귀는 친구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므로 인생의 목표가 비슷하게 되어 친구를 사귀는 일에 특별히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했고 또 어렵고 험난한 일을 두루 겪어서 사람들의 심리를 제법 알게 되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형제들과 우애롭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그가 충성스럽고 인정 많고 부지런하고 온 정성을 다하여 나를 떠받들어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잘 대하다가도 나중에는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매몰차게 돌아서기 때문이다.
문명 세계에서 떠나지 마라
무릇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안은 갑작스레 재난을 당해도 아무런 걱정 없이 느긋하게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몰락하여 먼 시골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사는 집안은 겉으로는 태평한 척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재난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고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그늘진 벼랑 깊숙한 골짜기에서는 햇빛을 보지 못해 어두운 생각을 갖고,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모두 버림받아 쓸모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라 마음속에는 원망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가진 견문은 문명 세계를 접하지 못해 실속 없고 비루한 이야기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멀리 떠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너희에게 바란다. 너희는 항상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벼슬하는 사람처럼 생활해라. 그리하여 자손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과거에 응시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고,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번 쓰러졌어도 언젠가는 분명히 일어설 수 있느니라. 만약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도망치듯 이사 가 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재물을 오래 지키는 법
세상의 옷이나 음식, 재물 등은 헛되고 부질없는 것이다. 옷은 입으면 닳고, 음식은 먹으면 썩고, 재물은 자손에게 물려줘도 끝내는 다 써서 없어진다. 그러나 몰락한 친척이나 가난한 벗에게 나눠 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노나라의 큰 부자인 의돈이 창고에 감춰 두었던 재물은 지금 흔적도 없다. 하지만 한나라 소부의 황금 이야기는 아직까지 전해 오고 있다. 소부의 이름은 소광으로, 태자의 스승이었다. 그는 황제한테 받은 황금을 어려운 사람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진나라 때 큰 부자인 석승의 화려했던 금곡 별장은 한갓 티끌로 변했지만, 송나라 때 범중엄이 친구를 돕기 위해 배에 가득 보리를 실어 나르던 일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내가 유배된 뒤부터 절친했던 친구들과 연락이 모두 끊어졌고, 사람들은 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나의 정도 날로 멀어지고 잊혀만 가는구나. 다만 모진 서리와 거센 바람을 맞기 전에 즐거이 노닐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때의 광경이 어젯밤처럼 눈앞에 생생하고 머릿속에 말똥말똥 떠오른다. 그때 있었던 일이나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기에, 그 풍채와 기상을 멋지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더구나. 하지만 막상 붓을 들고 보니, 시상이 막혀 마음속에만 뱅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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