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글을 열며 나는 누구인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제1장. 나는 왜 고독한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2장 나는 왜 착각하는가
[독후방] - 생각의 속임수 - 3장 나는 왜 후회하는가
(권택영, 글항아리, 2018)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줄 것 같은 연인. 그래서 그 남자 혹은 여자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애착, 이것이 에로스의 두 얼굴이다. 애착은 서로를 돌봐주기에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사랑의 리비도다. 그러나 집착은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소유욕이다. 전자는 타인을 인정하며 사는 사회의식이고 후자는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성적 욕망의 본질이다. 두 얼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안타깝게도 후자가 절대적으로 강하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은 사랑과 관용보다는 증오와 집착이다.
프로이트는 집착이 둘이 하나 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 즉 만물에 내재된 죽음본능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저 유명한 [ 문명 속의 불만] 에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그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어떤 불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만 그 행복은 찰나일 뿐 길어지면 묽어지고 다시 불만이 생긴다. 불만은 생존의 조건이다. 삶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서 그것을 거둘어줄 손길이 필요하다. 고통을 줄이는 과학기술, 예술, 그리고 술이나 아편 같은 인위적인 무감각이다.
프로이트가 죽음만이 이 불만을 완벽히 채운다고 말했듯이 불만을 없애버리려는 갈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불만은 어떤 행태로 존재해야 안전한가? 적절한 공간으로 존재해야 삶의 동인이 된다.
타인을 나의 경험과 시각으로 보는 착각은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의식 외에 몸, 감각이 있고 감각은 경험을 저장하는 저장소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저장소 안에 없다. 자식은 경험하고 싶어한다. 비록 그것이 실패의 길일지라도 스스로 맛보고 쓰라림 속에서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그러나 부모에게 이것은 싶지 않다. 아이의 낭패는 자신의 실패보다 더 아프기 때문이다. 그냥 두고 보는 것도 부모의 도리가 아니다.
가장 좋은 충고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은 의식을 통해 나오지만 행동은 몸을 통해 나오므로 명령이 아니다. 아이는 절대 부모의 말(의식)을 따르지 않는다. 부모의 행동(무의식의 힘)을 따른다. 오히려 부모의 성공과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부모는 자식이 되고 싶은 이상형, 배워야 할 사회적 윤리를 스스로 실천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진정한 부모의 사랑은 지나친 책임감이나 소유욕이 아니고 자식의 경험 수준을 가늠하는 지혜다. 집착은 감각과 의식 사이의 텅 빈 공간, 혹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생각의 속임수를 모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자식의 경험으로 내려가는 일은 왜 어려울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웃어서 기쁘고, 울어서 슬프고, 도망치니 두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임스의 말이 옳다고 인지해도 나는 오뚝이처럼 자동적으로 반대로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문학과 뇌과학과 심리학은 그토록 ' 내 안의 또 다른 나'인 감각을 섬기라고 말하고 또 말한다.
인간이 감각에 집착하고 사회로 진입하지 못하면 언어와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정신병자가 된다. 의식과 감각이 서로를 인정하면서 균형을 이룰때에만 오직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 장소를 떠올리는 것은 의식이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의식이다.
감각을 무시하고 의식에 집착하면 도착증을 보이거나 타인의 경험을 인정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진다. 반대로 의식을 무시하고 감각에 집착하면 자아가 형성되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린다. 그러면 집착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돈에 대한 집착은 찾는 과정에서 어린 선생의 집념이 된다. 집착은 목표를 얻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반면 집념은 그 과정에 의미를 둔다. 목표물은 삶을 지속시키는 허상이기에 얻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다시 더 얻기 위해 가야 한다. 가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더 빨리 가서 얻어야 한다. 그러나 목표물이 아무것도 아닌 환상의 대상인 것을 알 때는 가는 과정을 중시하게 된다. 과정에서 무언가 얻고 깨닫는다. 삶은 죽음을 얻기 위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이런 사실을 알면서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여 천천히 가는 것이 집념이다.
부모님이나 가족의 죽음은 슬프다. 그러나 그런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치유되고 일상의 삶으로 복귀한다. 망각의 힘이다. 이것이 애도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나는 연인이나 동료의 배반은 마음에 극심한 상처와 충격을 남긴다. 삶을 연결하는 씨줄과 날줄의 하나가 툭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충격과 치욕은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는데, 무엇보다 후회와 자기 비난으로 인해 잊으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애도와는 다른 우울증이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의 원인인 자기 비난이 대개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에게 잘 일어난다고 말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나무라지 말고 긍정하며 하던 일을 꾸준히 해 좋은 결과로 앞의 나쁜 경험을 덧씌우는 것이 좋다. 결국 자신감의 상실에서 증상이기 때문에 더 좋은 일로 나쁜 기억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한번 경험한 것은 몸에 새겨지기 때문에 더 좋은 일로 나쁜 기억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한번 경험한 것은 몸에 새겨지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지만 충격이나 분노와 수치심의 강도는 낮아지고 점차 떠오르는 빈도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치유법이다.
일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배반당하면 후회와 증오 속에서 사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해 성취의 기쁨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종범 스님에 따르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다. 마치 소를 타고 가는 사람이 소가 있다는 말에 소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것이 소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
집착은 허상에 쫒길 때 일어난다. 라캉은 욕망의 철학에서 마음을 비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텅 빈 공허, 불안을 충족시키려면 대상 추구는 불가피하다. 그 대상은 불안을 충족시킬 것 같은 이상형이다. 불안을 투사한 대상이기에 얻고 나면 그때뿐 다시 공허가 생긴다. 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높은 대상을 원하게 된다. 마음을 비우라는 것은 대상을 향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더 빨리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얻지 못하면 대상을 파괴하려는 충동은 모두 집착이 낳은 질병이다.
우리는 왜 고독한지, 착각은 왜 피할 수 없는지, 후외와 집착은 왜 나를 유혹하는지 ...... 이 모든 증상의 원인은 의식이 주인이면서 동시에 아니라는 데 있다. 의식은 문패를 붙이고 사는 입주자다. 그러나 실제 집주인은 감각이다. 같은 집인데 집주인과 입주자가 다르기에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이중 구조를 깨닫는 길이 정상적인 마음의 균형을 이루고 사는 길이다.
공감은 진화의 산물이면서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타인과의 소통, 문학의 감상 등 공감은 사회성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기억의 흔적과 의식이라는 뇌의 이중 구조로 진화한 인간은 지혜를 가진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탐욕, 집착, 부패, 잔인함, 그리고 자연의 약탈로 얼룩진 부정적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부정적 측면을 줄이고 긍정적 윤리를 연습하는 가장 고급의 뇌 기능은 공감이라는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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