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 북스, 2012)
1권
제1편 북극의 풍우
언젠가 겪었던 일이 연쇄적으로 뇌리에서 다시 떠오른다.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눈에 뛴 것이 맷돌이었고 그 맷돌 밑부분에 쳐놓은 거미줄에서는 바야흐로 무서운 사투가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모기모양이나 모기보다는 한결 완강하고 정력적으로 생긴 날벌레와 그 날벌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와의 싸움이었다. 파득거리는 벌레의 날개에서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상은 물 묻은 손을 뻗쳐 거미줄을 확 젖혔다. 한데 달아날 줄 알았던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가사상태를 위장하면서 다리 두 개를 뻗쳐 벌레를 잡고 놓질 않는다. 두개의 다리는 흡반이 달린 문어 다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견딜수 없는 증오심에서 길상은 거미를 문들어 죽이고 말았다. 날벌레는 높이높이 비상하여 가버렸다. 그러나 길상의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신변에 위기를 느꼈음에도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는 그만큼 기아선상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것에게서 먹이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처사였더란 말인가. 비를 바라보면서 길상은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손길이 벌레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심판은 과연 옳았던가? 인간의 경우에도.
2권
제2편 꿈속의 귀마동
"앙입매다. 거짓말으 마옵소꽝이. 어째 모르겠습매까. 생각으 해보옵소. 어째 새 총각으 처지 아라까지 따른 가스집(과부)과 혼인하겠슴? 사람으 괄시하면 앙이 됩매다. 누귀 그 말으 믿겠소꽝이? 그러잖애도 그분이 도와준 돈으 갚겠다아 그 일념으로 밤 새워가문서리 바느질으 하는 거요."
아가씨! 돈방석에 앉은 놈만 도도한 줄 아시오? 피죽 먹는 놈도 도도할 수 있단 말입니다. 신주 모시고 족보에 곰팡이 싣는 양반네만 기고만장인 줄 아시오? 상놈 백정도 기고만장 못하란 법 없지요. 대명천지에 돈 있고 족보 있는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다간 큰코다칠 게요. 오장육분 어느 쪽이 성할까?
3권
제 3편 밤에 일하는 사람들
시래기죽을 끓여 양푼에 퍼다 놓고 식구들이 좁은 방 안에 둘러앉았을 때 석이의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든 순연의 얼굴 쪽으로 쏠린다. 어글어글한 눈이 확 풀어지는가 싶더니 빛이 번쩍 난다. 맞을 때는 아파겠지만 노상 양이 차지 않는 아이들 배에서는 꾸럭꾸럭 소리가 나고 매 맞을 때 아픔 같은 것은 잊었는가 먹는다는 기쁨에서 침이 연신 넘어간다. 설움이 무엇인가 추위가 무엇인가, 아이들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이 순간이 무한하게 행복한 것이다.
제 4편 용정촌과 서울
장씨의 부정을 기를 쓰며 주장한다.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일가친척이 못난 놈, 옹졸한 놈, 몰상식한 놈 하며 각기 내뱉은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면 될 거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혼은 못한다. 이미 장씨를 학대하는 쾌감유 느끼는 때문이다. 주변에서 소외당하는 과잉 자각은 그의 설 자리를 좁혔고 숨구멍은 아내를 학대하는 행위에서만이 트이는 것이었으니까. 하여 영환은 날로날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고 황폐한 감정의 수렁 속으로 아편쟁이처럼 빠져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촉진한 것은 부친이 자기 몰래 동생 장환을 위해 재산을 따로 마련해둔 사실이다.
어차피....살아주는 게야. 정이 없으니 미울 것도 없고 남 보듯 살면 되는 게야
'저자, 저 어리석은 위인 좀 보게? 후손 없단 말만 들어도 구미가 동한다. 그겐가? 하기는 도둑질이란 한번 배우면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거구... 허어, 그러나 저 시꺼먼 마음보 때문에 제 망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세상에 이치같이 절묘한 게 어디있을라구. 밤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 말고는 악이란 결코 용서받을 순 없는 게야.'
4권
제 5편 세월을 넘고
으레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감정이란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더욱더 좋게, 나쁜 것은 더욱더 나쁘게, 슬픔이나 기쁨도 표준을 잃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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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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